"모두가 변화의 주체"(Everyone a Changemaker)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1980년 설립된 글로벌 비영리 조직 아쇼카(Ashoka)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혁신가(아쇼카 펠로우)를 전 세계에서 발굴해 왔다. 2013년 아쇼카 한국 지부 초대 대표로 취임한 이혜영 교우는 대학 시절부터 인권과 사회 변혁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과 홍콩 등 아시아에서 활발히 활동해 왔으며,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아쇼카에서 12년 동안 15명 이상의 한국인 펠로우를 지원해 왔다.
무지갯빛 사회 키운 인권 감수성
이 교우가 떠올리는 10대 시절은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이 크다. 한창 꽃피울 청소년기 아이들이 그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말을 잘 듣는지 안 듣는지로만 구분되고, 교육 현장에서 폭력이 일상이던 시대였다.
"저는 서울 변두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의 편애를 받았지만, 친구들이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걸 보며 큰 상처를 받았죠. 올림픽이니 민주화니, 사회는 나아졌다고 했지만 어린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어른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던 것 같아요."
고대와 영자신문사에서 나를 발견하다
이 교우는 아버지의 주재원 발령으로 가족과 함께 고등학교 3년간 홍콩에서 거주했다. 낯선 사회에서 다양한 친구들과 보낸 2년 반의 고교 생활은 세상에 대한 그의 시각을 바꿔 주었다."아시아인으로서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다양함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죠.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계뿐 아니라 백인 등 다양한 인종과 배경, 문화를 가진 친구들과 영어로 소통하면서 내면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죠. 자신감도 많이 붙었고요."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껏 누리던 이 교우는 대학에 진학할 때쯤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모교인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한국전쟁 당시 친할아버지께서 북에 부역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셨어요.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로 외롭게 자란 아버지는 열심히 공부해서 고대에 입학하셨죠. 저 또한 아버지의 모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녀로서 사명감 같은 게 있었나 봅니다."
이 교우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고대 영자신문사(The Granite Tower)에서 활동했다. 편집국장을 맡아 굵직한 전 과정을 총괄할 만큼 신문사 활동에 푹 빠져 지냈다. 이 경험은 그가 소셜 앙터프리너로서의 정체성을 다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다양한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향해 간다는 게 정말 좋았습니다. 조판이나 인터뷰 자문 등 외부 전문가들과 협업도 해야 했고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무에서 유를 만들고 뭔가 일으켜 세우는 걸 무척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Give value first. 내가 먼저 가치를 줄 때 결국 나에게 두세 배의 크기로 돌아올 거라는 말이 정말 맞다는 걸 느껴요."
Give Value First, 먼저 주는 삶으로
영자신문사 국제부에서 활동하며 NGO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이 교우는 국제대학원 재학 중 홍콩에 있는 아시아 인권위원회에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고 인턴으로 일하게 됐다. 홍콩으로 가기 전, 아시아인권위원회의 초대로 방문한 광주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그 단체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광주와 같이 일을 해 왔어요. 한국전쟁과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과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보며, 저의 가족과 그들, 그리고 현재 북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아시아와 북한 인권 현장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북한인권시민연합에 들어가 국제 캠페인을 담당했고, 2005년 인권 단체 '바스피아'를 설립하여 인권 운동의 새로운 페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아시아 곳곳을 연결하고자 했다.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이주했다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한국에 들어온 그는 사회혁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글로벌 NGO단체 아쇼카가 한국에 지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표로 자원해 수많은 펠로우를 만나고 지원해 왔다.
2019년 아쇼카 본사에서 진행된 창립자 빌 드레이튼과 리더들의 리트릿
2022년 스페인 빌바오에서 개최된 제1회 뉴 론제비티 국제 컨퍼런스에서 오프닝 연설을 하는 장면
"아쇼카의 관심은 모든 영역을 아우릅니다. 사회 문제를 내 문제로 생각하고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아쇼카 펠로우로 선정해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죠."
그는 소셜 앙터프리너 뿐 아니라 모두가 변화를 주도하는 체인지 메이커로 성장하려면 스무살까지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쇼카 한국에서 유독 교육 프로젝트가 돋보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교육 현장이잖아요. 'Everyone a Changemaker'로 가는 첫 단추가 교육에서의 변화라고 보는 겁니다."
이 교우는 기존 사회가 정답이라고 하는 공식이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면 자기 감각을 믿고 나아가기를 권한다. 함께 문제를 풀어나갈 멋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결국 더 큰 가치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남아공의 한 펠로우가 해 준 조언이 잊히지 않아요. 'Give value first.' 내가 먼저 가치를 줄 때 결국 나에게 두세 배의 크기로 돌아올 거라고, 그러니 결코 희망을 놓지 말라고요.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그 말이 정말 맞다는 걸 느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다섯 개 대륙에서 온 이메일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 교우는 세계 곳곳의 '한 사람'들이 지켜 내는 가치와 용기가 사회를 바꾸는 강력한 힘이라고 믿는다. 외로워하지 말라는 위로와 함께, 그는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