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열매 맺는 사람. 김종철 교우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힘쓰는 그는 높은 곳을 향하기보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발맞추어 걸어왔다. 변호사로 인생의 전반부를 보내고, 이제는 농사도 같이 지으며 살아가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 김 교우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가 정성 들여 기르는 가지각색의 농작물만큼이나 다채로운 색을 띠었다.
법대생의 낭만 어린 캠퍼스 라이프
대학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전공인 법학에도, 동아리 활동에도 흥미가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끼어 있는 학생이었어요. 당시 많은 학생이 몸을 던졌던 민주화 운동에 함께하지도, 공부를 열정적으로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초등학교 때 배우던 바이올린을 다시 켜 볼 생각으로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는데 유독 세련된 학생들만 모인 곳이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웃음)."
그럼에도 고려대학교에서 추억이 가득 쌓인 건 캠퍼스 커플로 학교 곳곳을 누빈 덕분. 사랑하기 바쁜 시절이었다. "연애를 제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같은 동네에서 자란 고등학생 후배가 있었는데, 학교 투어를 시켜 줬어요. 그리고 마침 그 친구가 고려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캠퍼스 커플이 됐죠. 둘이 고전음악 감상실 앞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씩 뽑아서 음악 듣는 척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나요. 8년을 만나고 결혼했습니다."
나그네들의 해피엔딩을 위해
긴 고시 생활 끝에 200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그는 바로 사법연수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강원도 양양의 기독교 공동체 '라브리'에서 방문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토론하고, 일하면서 2년을 보낸 것. 뒤늦은 출발은 오히려 새로운 실험에 삶을 던져 보는 계기가 됐다. 그중 김 교우의 삶을 가장 크게 바꾼 건 공익을 위해 변호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박해를 피해 낯선 땅을 찾아온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순간, 그만의 유니크한 커리어가 시작됐다.
"첫 직장이었던 법무법인 소명에서 일하면서 프로보노(무료 변호)로 난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어요. 사법연수원 시절 자원봉사 현장에서 들은 다양한 난민들의 이야기에 매료됐었거든요.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아온 저와 달리 그들의 인생은 용기 있는 선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이 사람들의 삶이 '해피엔딩'을 향하면 좋겠다, 내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가 2011년 세운 비영리 단체 '공익법센터 어필'은 난민, 인신매매 피해자, 구금 이주민 등에 대한 소송 지원과 정책을 연구하며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권리 구제에 힘쓰고 있다. 후원 기반의 변호사 공동체를 꾸려 가는 것도 도전이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는 인종차별도 넘어야 할 산이다. "초창기에는 변호사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의 후원과 기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동참해 주셔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재정적인 부분보다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이주민에게 닫혀 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일하는 게 힘들 때가 있어요."
승소 사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비율로 따지면 반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이라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김 교우는 결과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한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편이 되어 싸운다는 건 승패와 관계없이 보람 있는 일이죠."
2018년 미국 국무부 '인신매매 척결 영웅상' 시상식에서
없던 길을 개척하는 그를 격려하듯, 몇 년 후 잇따라 영광스러운 소식도 찾아왔다. 어필은 2016년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수여하는 '변호사공익대상'을, 김 교우는 2018년 미국 국무부에서 선정하는 '인신매매 척결 영웅상'을 수상했다. 소감은 겸손했다. "인신매매와 관련해서는 더 오래 일해 오신 분들이 있어 조금 민망했어요. 미국에서 상을 받았는데,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트럼프 전 대통령 딸 이방카가 시상자로 나와 신기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편이 되어 싸운다는 건 승패와 관계없이 보람 있는 일이죠."
반농반변을 꿈꾸는 초보 농사꾼
몇 년 전, 김 교우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신인이 됐다. 새롭게 생긴 타이틀은 바로 양양의 농부. 2019년, 공익법센터 어필의 대표 변호사직을 내려놓고 미국의 팜스쿨(farm school)을 다녀와 내린 결정이다. "안식년 기간에는 무조건 한국 밖에서 완전히 다른 일을 해 보라는 조언을 듣고 미국으로 갔어요. 그때 농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농부는 그에게 아주 매력적인 제2의 직업이다. "변호사는 리서치와 글쓰기를 많이 합니다. 머리를 쓰죠. 반면 농부는 몸을 쓰고, 고생에 대한 열매를 빨리 보고, 만지고, 먹을 수 있어요. 두 가지 일을 다 하는 게 삶의 균형과 건강에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반농반변'(반은 농부, 반은 변호사)의 삶을 지향하는 김 교우는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토마토와 콩, 꿀 등을 길러 주변 사람들에게 팔거나 나눈다. 이 일은 그의 시선을 또 다른 현장으로 향하게 했다. "기후 위기 때문에 취약해진 사람들의 권리가 새로운 관심사입니다. 재생에너지 사업이나 풍력 발전소 건립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는 농민들, 그리고 염전이나 원양 어선에서 강제 노동 피해를 본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캐나다, 미국, 멕시코처럼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의 수출과 수입을 제한하는 시스템이 한국에도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의 신비
커리어의 변천 과정에서 김 교우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환대'다. 나의 행복과 이익과 안전을 확보하는 데만 급급한 이 시대에, 어떻게 환대의 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그는 군 시절의 추억 하나를 꺼냈다.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어요. 행군 중 저도 더 이상 못 걷겠는데, 제 옆에 있는 친구가 쓰러졌어요. 그 친구를 끝까지 데려가려면 짐을 덜어 줘야 했죠. 주변 사람들이 총을 비롯한 여러 물건을 하나씩 들어 주기 시작했어요. 모두가 지쳐 있는 상태였는데, 쓰러진 친구의 물건을 들어 주는 순간 없던 힘이 막 생기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공익을 위해서 일할 때도 그런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약자의 짐을 조금씩 나눠 지려는 마음이다. 이주민들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빛과 색을 더해 주는 존재라는 인식이 그 바탕이 된다. 환대와 만남, 대화와 이해가 곧 '나의 행복'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게 김 교우의 생각이다.
"이주민, 난민 하면 저는 가장 먼저 '다양성'이 떠올라요.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아주 큰 축복입니다. 또 여러 의미에서 그들은 제게 깨달음을 주는 선생이에요. 만약 이주민들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저는 평범한 변호사로 남았겠죠. 덕분에 제 인생이 풍부해졌습니다. 결국 가장 큰 수혜자는 '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의 별들은 언젠가 이어집니다
'중간에 끼어 있던' 대학 시절부터 농부 변호사가 되기까지, 좌절과 기쁨의 순간들을 지나며 김 교우는 자신을 환대하는 법도 배웠다. 꼭 빠르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과 함께. "어릴 때 '나는 왜 항상 느릴까?'가 고민이었는데, 시간이 걸려도 열매를 맺는 경험이 쌓이면서 무언가를 성취하기까지 오래 걸려도 괜찮다는 걸 느꼈어요. 이제는 일희일비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아직 경험치가 부족한 청년의 시절에는 무엇을 믿고 용기를 내야 할지 궁금했다. 뛰어난 재능? 성실함? 그는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나아가라는 조언을 건넸다.
"최근 읽은 《인간이 지워진다》라는 책에 따르면, AI는 무관한 점들을 이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해요. 마치 별자리처럼요. 우리는 하늘에 그냥 떠 있는 별들을 연결하고, 별자리마다 어울리는 이야기도 만들어 내잖아요. 제가 살아온 여정도 서로 상관없는 사건과 경험들이 다 연결돼서 이야기가 됐어요. 지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일도 나중에는 이어져요. '버릴 건 없구나' 하는 생각을 요즘 해요."
타인을 환대하는 삶을 선택하기란 어렵다. 당장 나에게 큰 이익이나 성취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김 교우는 묵묵히 밭을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기꺼이 사랑의 씨앗을 뿌리라 말한다. 때가 되면 나만의 이야기가 생길 테니 모두가 가는 길을 벗어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김 교우는 변호사 일을 시작하던 초기부터 이미 농부였는지 모른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 곧 '나'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빛나는 별자리로 가득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