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 중심의 시선으로는 온전히 읽히지 않는 유럽이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폴란드와 발칸반도의 국가들처럼 언어와 민족, 종교가 복잡하게 얽힌 '슬라브 세계'다. 최정현 교수의 교양 수업 '슬라브 세계의 이해'는 이 낯섦을 흥미로 바꿔놓는다. 이 수업은 지리적 이동 없이 사고의 지평을 바꾸는 여행이다.
낯선 문자에 이끌려 낯선 세계를 향해
수업을 이끄는 최정현 교수는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슬라브 문학과 사상, 종교를 연구해 온 학자다. 고등학생 시절, 소련 선수단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방한하는 장면을 TV로 본 그는 러시아어 알파벳의 낯선 생김새에 이끌렸다. "아에로플로트(Аэрофлот, 러시아의 대표 항공사 상호)라는 글자를 보고 '이 이상한 글자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그는 노어노문학과에 입학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유학을 거쳐 연구와 강의를 이어왔다.
처음엔 러시아의 언어와 문학에만 집중했지만, 중세문학을 전공하며 슬라브 세계 전체에 눈을 뜨게 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발칸반도 국가들 간의 복잡한 역사와 종교, 언어의 분화를 배워 나가면서, 단일국가 중심의 서구 시각에는 포착되지 않았던 또 다른 유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정현 교수
교양으로 만나는 '보이지 않았던 유럽'
원래 노어노문학과 전공 수업을 담당해 온 최 교수는 슬라브 문화권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는 흐름을 반영해, 2022년 학부 교양 수업 개설을 구상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접하면서, 단순히 전투의 양상보다는 그 배경과 맥락을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어요. 중세부터 이어진 슬라브 세계의 역사와 문화, 종교, 정치의 흐름을 보지 않으면 지금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수업은 우리가 간과해 온 슬라브 세계가 사실 서구 역사 곳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의 시초로 알려진 마르틴 루터보다 앞서 체코에서 개혁운동을 펼친 얀 후스, 세르비아 출신의 천재 공학자 니콜라 테슬라,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의 총성까지. 최 교수는 복잡한 국제정치나 문화사를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낸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슬라브라는 타문화가 '우리가 속한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법, 공존을 배우는 교양
최 교수는 "이 수업의 핵심은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영상 자료, 지도, 음악 등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여 '듣는 강의'가 아닌 '생각하는 수업'을 만든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보기 싫으면 손이 안 가잖아요. 강의도 마찬가지예요. 흥미롭게 보여야 마음이 움직이죠."
학생들 역시 수동적인 청취자가 아니다. 학기 중 슬라브 문화와 관련된 텍스트나 영화를 읽고 짧은 감상문이나 분석문을 제출해야 한다. 작년에 수업을 수강한 한 학생은 슬라브 문학 작품에 대한 소감문을 10쪽 분량으로 정리해 제출했고, 최 교수는 "이 정도면 학술지에도 실을 수 있겠다" 고 평가했다. "그럴 때면 오히려 제가 학생들에게 배우는 기분이에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실감이 납니다."
수업엔 다양한 전공, 다양한 학년의 학생들이 참여한다. 처음에는 다른 세계를 향한 작은 호기심에서 수업을 신청한 학생들이, 한 학기만 지나면 '유럽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얻게 된다. 실제로, 수강생 박정욱 학생(지구환경과학 20)은 "과학 전공 수업은 정답이 있지만, 이 수업은 답이 없어요. 시대와 맥락을 이해해야 하니까 더 생각하게 돼요"라고 말한다. 이현수 학생(의학 23)도 "지금이 예과 마지막 학기라 앞으로는 이런 수업을 듣기 힘들 것 같아 신청했어요. 유럽사를 프랑스나 독일 중심으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슬라브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다시 보게 됐어요"라고 밝혔다.
외국인 유학생 다리야 학생의 반응도 뜨겁다.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요. 교수님이 이야기처럼 들려주셔서 매 강의가 기다려져요." 그는 "사람들이 슬라브 세계를 조금 무섭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따뜻하고 친절한 문화예요"라며 웃었다. 다리야는 이 수업을 "새로운 시각을 알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추천한다"고 강조했다.
교양,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
박정욱 학생은 "앞으로 유학을 가거나 다른 문화권 사람을 만날 때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최정현 교수는 교양 수업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한다. "대학은 단지 진로를 위한 준비 공간이 아닙니다. 낯선 것을 배우며 자기 생각의 폭을 넓히는 곳이에요. 교양이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슬라브 세계의 이해'는 바로 그런 수업이다. 특정 국가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장. 어렵지만 흥미롭고, 낯설지만 더 알고 싶어지는 시간. 타 문화의 '다름'을 이해하고, 나의 세계와 연결하려는 상상력이야말로 교양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