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은 창 너머로 북악산의 능선이 시원하게 이어진다. 거실 한쪽,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오래된 서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낡은 책장과 책상이 경계를 잃은 채 책으로 가득 차 있고, 천이 해어진 소파와 자판이 닳아 글자가 지워진 키보드, 뿌연 모니터, 빛바랜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햇빛이 세월을 말해 준다. 이곳은 김우창 명예교수의 공간이다.
김우창 명예교수
사유의 공간에서 흘러온 시간
김 교수가 40년 넘게 살아온 이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잇는 사유가 구축된 장소이자 그의 철학이 응축된 시간의 결이다. 이곳에서 그는 책을 읽고, 문장을 곱씹으며, 글을 써왔다.
김 교수는 1974년부터 2003년까지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퇴임 후에는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이화여대 학술원 석좌교수 등 꾸준한 학문 활동과 저작을 통해 한국 인문학의 저변을 확장해 왔다. 2018년,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아 암브로시아나 정회원으로 선정되었고, 2022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하는 등 국내외 학계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의 삶과 학문이 오롯이 한국 인문학이 걸어온 궤적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학자인 스승의 공간을 21년 넘게 지켜보며 카메라에 담아온 사람이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김 교수의 제자인 최정단 교우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의 열기와 혼란이 교차하던 시절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최 교우는 ‘영미시 개론’ 수업에서 김 교수를 처음 만났다. 절망과 불안의 공기가 가득한 캠퍼스 한가운데서, 그의 수업은 마치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혼돈 속에서 마주한 시와 문학의 세계는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당시 김 교수는 교단에서의 역할을 넘어, 시대의 책임을 짊어진 지식인이기도 했다. 1986년, 고려대학교 교수단을 대표해 시국선언문을 정리해 발표했고, 학생들이 연행되었을 때는 경찰서를 직접 찾아가 “우리 학생들 잘 부탁한다”며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 “시인이란 고통조차도 찬양하게 하는 존재”라는 그의 말,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보여준 실천에 깊은 울림을 느낀 최 교우는, 현실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에서도 한 줄기 햇살을 감사히 여기는 마음, 바로 그 ‘시인의 영혼’을 품게 된다.
다큐멘터리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스승의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 뛰어들다
김 교수가 정년을 맞이한 2004년, 미국에서 막 귀국한 최 교우는 카메라를 들고 스승의 출판기념회에 찾아갔다. 처음엔 강연을 기록하는 아카이빙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의 렌즈는 학문적 기록이나 학자의 사상이 아닌 사유와 삶이 맞닿은 한 노학자의 일상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의 카메라는 점차 김 교수의 삶을 통해 사유하는 인간이 지녀야 할 윤리를 몸소 보여주는 지식인을 비추었다.
최 교우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에는 시대와 인간에 대한 김 교수의 탐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 교우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학문과 삶의 일치’를 향한 김 교수의 구도적 일상을 비춘다. 화면에 담긴 김 교수는 오랜 시간 천천히 일상의 행위를 반복하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최 교우는 이 느리고 반복적인 노학자의 일상에서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일상의 풍경과 연결되는지 포착하려 했다고 밝힌다.
카메라는 김우창 교수가 오랜 세월 머물러온 공간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유의 흔적을 따라간다. 책을 읽고, 사색하고, 자연과 동물을 돌보고, 글을 쓰는 행위들이 마치 하나의 수행처럼 이어진다. 그것은 지식을 쌓는 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 존재 그 자체를 탐구하는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최 교우는 내밀한 공간에 머무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이 모르던 ‘인간 김우창’을 담으려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학문과 삶의 일치’를 담은 21년의 여정
문학비평가이자 철학자, 사상가이자 에세이스트. 그러나 그 어떤 호칭으로도 김우창 교수의 위상을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동서양 인문학과 정치, 예술, 문학, 심지어 자연과학까지 넘나드는 그의 폭넓은 사유는 그를 ‘지성인의 지성인’, ‘한국 인문학의 큰 봉우리’로 불리게 했다.
“선생님은 메를로 퐁티, 하이데거, 푸코, 릴케 같은 사상가와 시인을 불러와 자신의 사유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서구 사상가들이 생각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확장해 내십니다. 그 독창성이 선생님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런 인정을 전혀 바라지 않으시지만요.” 최 교우의 말처럼 그의 다큐멘터리는 김우창이라는 이름보다 그가 행한 ‘사유의 방식’을 남기고자 한다.
인터뷰하는 김우창 교수와 최정단 교우
사색과 침묵을 사랑하며 내밀한 공간에 머무는 스승을 20년 넘게 따라다니며 촬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인물을 담는 일은 고통에 가까웠다. 재정적인 부분도 큰 도전이었다. 제작비를 사비로 충당하며 버텼고 개인적인 후원에 기대야 했다.
그렇게 21년 만에 마침내 완성된 다큐멘터리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고, 11월 27일~12월 5일에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내년에는 정식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최정단 교우(영어영문학 86)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지성의 정신
최 교우는 이 작업이 김우창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넘어, 한 시대의 인문학적 유산을 다음 세대로 전하는 길이 되기를 바란다. “20년 넘게 아카이빙한 자료가 많습니다. 앞으로는 방송이나 유튜브, 책,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싶어요. 저 혼자 하기에는 벅찬 작업입니다. 이 뜻깊은 작업에 우리 고려대 가족들이 함께해 주신다면 더없이 든든하겠습니다.”
김우창 교수는 한국 인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유의 축으로 자리해 왔다. 최 교우의 기록은 그 사유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넘어 학문과 시대의 윤리로 확장되는지를 영상언어로 보여준다.
“2005년 석학 강좌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의견이나 신념이 아니다. 상냥한 마음, 친절함, 너그러움이다.’ 저는 이 말씀이 곧 선생님이 세상을 대하시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최 교우가 오랜 여정을 통해 길어 올린 다큐멘터리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는, 한 지식인의 정신을 다음 세대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이자 또 다른 형태의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