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을 오르고, 눈 덮인 능선을 걷고, 텐트 하나에 몸을 웅크린 채 밤을 보내는 이들. 고소공포도, 추위도, 체력도 넘어서며 나를 밀어붙이는 시간. 누군가는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묻지만, 고려대 산악부 부원들의 대답은 단순명료하다. “고생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다시 산에 오르게 됩니다.” 도전과 낭만, 그리고 끈끈한 동료애가 살아 숨 쉬는 산악부의 세계.
2024년 시립대 산악부와 함께 도봉산 우주선(우이암-주봉-선인봉) 루트 도전 중
Q. 고려대 산악부는 어떤 동아리인가요?
우현: 고려대 산악부는 체육국 소속 동아리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자연암벽 등반 동아리입니다. 많은 분들이 ‘등산 동아리’로 오해하시는데(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희의 주된 활동은 암벽을 오르는 것입니다. 체력 훈련의 일환으로 트레일 러닝과 등산도 병행하며, 새벽 일찍 등반을 준비할 때는 야영도 합니다. 학기 중에는 서울 근교에서 정기 등반을 하고, 방학 중에는 전국 각지와 해외로 원정을 떠납니다. 최근 3년간은 키르기스스탄 알라아르차, 프랑스 샤모니몽블랑, 캐나다 밴프에서 원정을 진행했습니다. 위험 요소가 많은 활동인 만큼 “산행의 끝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산악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현: ‘사서 고생’이라는 말만큼 산악부를 잘 설명하는 말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고생만 있는 건 아닙니다. 땀 흘리며 오른 정상에서 마주하는 탁 트인 풍경, 한계를 넘어섰을 때의 뿌듯함,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과 감사함. 이런 것들이 있기에 다시 산을 찾게 됩니다.
선호: 유튜브 댓글이나 주변 사람들 반응을 봐도 대부분 “왜 굳이?”라고 하죠. 그래도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정말 힘들었던 순간들이더라고요. ‘사서 고생하는 동아리’ 맞습니다.
재율: 낭만. 평소에 경험하기 어려운 활동—야영, 암벽 등반, 빙벽 등반, 캠프파이어 같은 낭만이 이곳에는 있습니다.
유민: 도전이요. 제게는 이곳에서 하는 모든 활동이 도전의 연속이에요.
Q. 산을 타면서 경험한 가장 짜릿한 순간은?
선호: 올해 2월, 설악산 토왕골을 안자일렌 방식으로 올라갔던 때가 가장 짜릿했어요. 서로의 몸을 줄로 연결해서 올라가는 방식이라 실수하면 다 같이 위험한 상황이었죠. 그렇게 올라간 대청봉 정상에서 본 설악산의 능선과 그 너머 바다 풍경은 정말 인상 깊었어요.
재율: 떨어지면 죽을 높이의 암벽을 장비 하나에 의지한 채 오를 때, 늘 공포감과 짜릿함이 동시에 밀려옵니다. 설악산 정상에서 발아래 펼쳐진 산 능선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어요. 산 전체와 도시, 그 너머의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죠.
유민: 첫 산행이었던 불암산 정상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처음이 좋았기에 아직도 산악부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아직 ‘최고의 풍경’이라고 꼽을 만한 건 없지만, 언젠간 만날 수 있겠죠.
Q.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면?
우현: 올해 1월 말, 설악산 대종주를 하던 중 실수로 잘못 가져간 텐트가 하계용 모기장 텐트였어요. 영하 40도의 날씨에 찢어질 듯한 바람과 결로, 추위 속에서 침낭에 웅크려 하룻밤을 버텼던 기억이 잊히지 않아요. 힘들었지만 지금은 큰 교훈이자 추억이 됐습니다.
선호: 죽음의 계곡에서 글리세이딩 연습을 하다 속도 조절에 실패해 굴러 내려온 적이 있어요. 얼굴이 얼얼해서 셀카를 찍었더니 코피가 나고 있더라고요. 태어나서 처음 흘린 코피였는데, 그땐 웃으며 넘겼습니다.
재율: 설악산을 등반하던 중 휴대폰을 떨어뜨려서 잃어버렸는데, 동기들의 도움 덕분에 기적적으로 찾았던 일이 있어요. 지금도 감사한 순간이에요.
유민: 고기를 구웠는데 가위를 안 가져와서 국수처럼 후루룩 먹었던 기억도 나요.
2024년 샤모니(Chamonix) 원정에서의 Mer de Glace 빙하에 위치한 뮬린 등반(좌), 2022년 종강산행 소백산 종주(우)
Q. 함께 등반하면서 특별한 유대감을 느꼈던 순간은?
우현: 등반은 항상 두 명 이상이 한 팀이 되어야 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에요. 빌레이어(belayer)* 라는 역할을 주고받으며 목숨을 맡기는 일이다 보니,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깊은 유대가 쌓입니다.
선호: 설악산 종주를 시작할 때, 무거운 짐을 메고 국립공원 입구로 걸어가던 순간이요. 그간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꼭 이 여정을 함께 해내겠다고 다짐했죠.
Q. 산행 후 특별한 루틴이 있다면?
우현: 산행이 끝나면 산악부실에 들러 장비를 정리하고, 후기를 작성하며 그날의 활동을 되짚습니다.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뒤풀이도 빠질 수 없죠! 하산 후에 자주 가는 식당이 있어요. 북한산 밑에 있는 치킨 집인데, 막걸리와 함께 치킨을 먹으면 정말 꿀맛이에요.
선호: 산행이 힘들어서 후회되다가도, 밥을 먹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도전을 계획하고 있더라고요. 참 이상해요.
재율: 저녁을 먹으며 산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네이버 카페에 후기를 남기는 게 저희의 전통이에요.
Q. 가장 인상 깊었던 산행 후기가 있다면?
선호: 이전 주장님이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에 남겨 놓은 후기들이 기억에 남아요. 산악부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주장을 맡고, 신입 부원을 받으며 느낀 점들을 굉장히 진심 담아 써 두셨거든요. 그분은 등반을 인생의 일부로 여기는 분이었고, 문장 하나하나마다 열정이 느껴졌어요. 지금도 그 글을 읽으면 “나는 이만큼 진실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요.
유민: 그 글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표현이 “우리는 왜 크랙(암벽에 생긴 갈라진 틈)을 오를까. 각자만의 꿈의 라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었어요. 말로 하면 조금 촌스러울 수 있지만, 직접 읽으면 등반에 대한 열정이 정말 강하게 느껴져요.
우현: 유민이가 쓴 후기들이 인상 깊어요. 저는 주로 사실 위주로 기록하는 편인데, 유민이는 그날의 감정과 사소한 기억까지 잘 담아 줘서, 제가 놓쳤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해요.
Q. 산에서의 경험이 평소 삶의 태도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우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고, 주장으로서 모두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세를 갖게 됐어요. 웬만한 스트레스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요.
선호: 산악부 활동이 워낙 고자극이라, 일상에서는 다른 자극이 별로 필요 없어요. 주말에 에너지 다 쓰고 돌아오면 일상은 덤덤하게 지나갑니다.
재율: 원래 겁도 많고 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성격이었는데, 산악부 활동을 하면서 ‘한번 해보자’ 하는 자세로 바뀐 것 같아요.
유민: 여러 도전적 상황을 겪다 보니, 웬만한 역경 앞에서는 “그때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됐어요.
Q. 새내기에게 산악부를 추천한다면?
우현: 산을 싫어하는 이유는 대부분 ‘힘들어서’지만, 산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정말 다양해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일단 한번 다녀오면, 자신만의 이유를 찾게 될 겁니다.
선호: 보람은 크지만 진입 장벽도 높은 활동이에요.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만큼 추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동아리는 없다는 겁니다.
유민: 가장 도전적인 동아리라고 생각해요. 도전을 좋아하거나, 내향적이지만 공동체 속 유대감을 바라는 분들께 추천해요. 산의 매력은 ‘몰입’, ‘모험’, ‘성취’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화하는 산악 부원들
Q. 가장 도전적이었던 등반 코스는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앞으로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산이 있다면?
우현: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네팔 히말라야 6,000미터대 고산, 파타고니아. 이 세 곳은 꼭 가 보고 싶어요.
선호: 인도네시아 푼착자야(카르스턴즈)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고려대 산악부가 아직 등정하지 못한 6대륙 중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언젠가 꼭 깃발을 꽂고 싶습니다.
재율: 설악산 동계 종주가 가장 도전적이었어요. 앞으로는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정상들을 모두 가 보는 게 목표예요.
유민: 간현암의 미완 등반 코스를 다시 도전해 보고 싶어요. 올해 예정된 북알프스 원정도 기대 중입니다.
Q. 졸업 후 가장 그리울 것 같은 순간은 언제인가요?
우현: 지금 이 순간이요. 열정 가득한 나, 퀘퀘하지만 아늑한 부실, 마음껏 산을 다닐 수 있는 이 시기가 모두 그리울 것 같아요.
선호: 주말마다 동기들과 무작정 떠날 수 있는 지금이요. 졸업하면 각자 삶이 생겨서 이런 무모한 산행은 어렵겠죠.
재율: 선배님들과 야영하며 모여 앉아 저녁을 나누던 그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고, 그리울 것 같아요.
유민: OB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긴 하지만, 형들한테 실컷 밥 얻어먹을 수 있는 재학생 때가 그리울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