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고즈넉한 골목 끝자락의 새하얀 건물. 간송미술관은 평범한 전시 공간이 아니다.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근간을 지켜온 치열한 기록의 공간이다. 현재 그 중심에는 간송미술관 전인건 관장이 있다. 그는 할아버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유산인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철학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며, 기술과 감성, 교육과 실천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고미술의 장을 열고 있다.
간송미술관 내부 간송 동상
문화보국의 뿌리, 고려대에서의 시간
"원래 학부 전공은 역사학이었고, 대학원에서 교육행정을 공부했습니다. 처음엔 미술관이 아니라 학교 운영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2006년 보성학교 100주년 기념 사업을 준비하면서 교육 사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전인건 관장에게 고려대학교는 석사 생활을 한 곳이자, 가문과 역사적 뿌리가 얽혀 있는 곳이다. "사실 저희 집안과 고려대의 인연은 꽤 깊습니다.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 학교가 간송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 보성학원은 간송의 스승인 위창 오세창 선생과 설립자인 이용익 대감의 뜻에서 비롯되었고,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의 중심이 되었다. "독립선언서 인쇄가 모두 보성사에서 이뤄졌고, 보성학교 학생들의 손으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이후 총독부의 박해로 문을 닫게 된 보성중학교를 간송이 1940년대에 인수하면서 보성중고등학교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전 관장은 캠퍼스에서의 시간을 '짧지만 인상 깊은 시간'이라 회상한다. "학위를 마무리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기억하는 '민족 고대'의 공동체 분위기는 참 따뜻했죠." 함께 지낸 동기들, 중앙도서관 2층 김형관 교수 연구실에서의 조교 생활, 종종 모여 앉았던 공대 뒤편의 오래된 식당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간송문화재단을 운영하는 지금도 고려대학교에서의 배움은 유효하다. "학교와 교육, 미술관의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을 키우는 일이잖아요."
시대를 관통하는 신념의 실천
그가 지금 간송문화재단에서 이어가고 있는 철학은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문화로 나라의 정신을 지킨다, 위창 오세창 선생의 철학이고 간송 선생이 현실화시킨 신념이죠."
이야기는 조곤조곤 이어졌다. 전 관장의 설명에 따르면, 간송은 일제의 문화유산 수탈에 맞서 우리 미술품을 수집했다. 문화는 국력을 지탱하는 정신의 골격이라는 것이 그 전제였다. "단원 김홍도 작품이 좋아서, 겸재 정선의 작품이 아름다워서 수집한 게 아니었어요. 단원과 겸재의 스승, 제자, 주변 인물들의 자료까지 계통적으로 모은 것을 보면, 광복 이후 실증적인 연구를 위한 기반을 마련한 거죠".
1938년 보화각 모습(좌), 현재 간송미술관(우) ⓒ 2024 Kim Yongkwan
그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1970년대에 탄생한 간송미술관은, 1년에 단 4주만 여는 미술관으로 오래 운영을 이어왔다. "개관 당시부터 1년에 4주만 전시가 열렸고, 나머지 48주는 연구소였습니다." 문화유산은 단지 전시하는 유물이 아니라, 연구와 교육을 통해 삶과 시대를 연결 짓는 생명체라는 믿음으로 충실히 연구하고, 연구의 결과를 전시의 형태로 내놓은 것이다.
그러던 중 고미술을 향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체감한 것은 2008년, 드라마 〈바람의 화원〉 방영 시기였다. "드라마에 간송이 소장한 미인도가 등장해요. 마침 그 시기에 정기전이 열려서 관람객이 폭발적으로 몰렸죠." 줄은 미술관 입구에서 한성대입구역까지 이어졌고, 수천 명이 2시간 넘게 기다려 입장했다. "원래 하루 100명도 안 오던 곳이었어요. 그때 처음 느꼈어요. 아, 간송이 꿈꾸었던 대중적 문화보국이 이제 가능해졌구나."
'금강내산' 전시 공간(좌), '삼청첩' 전시 공간(우)
고미술, 기술을 입다
간송의 철학은 이후 새로운 기술과의 협업을 통해 더욱 확장되었다. 전 관장은 말한다. "우리는 늘 '문화는 과거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전통은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다시 손에 쥘 수 있도록 계속 다듬고 움직여야 하는 거죠."
2014년, DDP에서 제안한 공동 전시는 그 전환점이었다. 간송의 문화유산을 더 많은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때부터 다양한 기업과 기술 파트너들과 협업했죠. VR과 결합한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국내 최초였습니다." 디지털 기술 수용에 매우 적극적인 전 관장의 면모는 할아버지를 닮았다. "간송 선생도 당대의 얼리어답터셨어요. 라이카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 남기셨고, RCA의 초기 오디오 기기를 국내에 들여온 것도 그분이셨죠."
이러한 정신은 2025년 현재, 영상·음향·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전시 기획으로 이어지고 있다. NFT 아트, 몰입형 미디어 전시, VR 체험, 향과 소리로 구성된 전시까지, 그는 시대의 기술을 매개로 간송의 유산을 번역하고 있다. 현재 DDP에서 진행 중인 이머시브 미디어아트 전시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에서 경험할 수 있듯이, 미술은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미래 세대는 전통과 자연스레 조우하게 된다.
"한 번 감동한 사람은, 다음엔 스스로 문을 열고 찾아 오더라고요." 그가 준비하는 미래는, 단지 전시의 확대가 아니다. 연구와 교육, 보존과 감상의 균형을 유지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 인프라를 단단하게 쌓아가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간송이 남긴 신념의 현대적 계승이자, 전인건 관장이 선택한 방식의 문화보국이다.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대구 그리고 세계로
2024년, 간송미술관은 서울 성북동을 넘어 대구로 향했다. 간송이 남긴 문화적 철학을 다른 지역과 세대가 체험할 수 있도록 미술관을 확장한 것이다. 전 관장은 대구를 선택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대구가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성, 다른 하나는 공연과 전시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높은 문화 감수성과 실제적인 수요였다. "서울에서 1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지만, 문화적으로는 다른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곳이었어요. 매진률, 관객 수, 반응 모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전시뿐만 아니라, 상설 프로그램과 교육 중심의 설계를 통해 '문화가 일상에 녹아드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연령별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부터, 지역 아카이브와의 협업까지, 그의 행보는 고미술이 어떻게 지역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문화라는 건 어느 특정 계층만 향유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접하고, 체험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가장 이상적이죠."
그는 전시회 관람을 단지 취미가 아니라 삶을 위한 경험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고려대 후배들에게도 예술과의 만남을 적극 권한다. "전시를 보는 건 감상이라기보다, 새로운 세계와 나를 만날 수 있는 접점이에요. 특히 고려대 후배들은 서울에 있으니 더 가까이서 누릴 수 있잖아요. 특히 문화예술계에 진입하려는 분들이라면, 일단 경험해 보면 좋겠어요. 직접 와서 보고, 느끼고, 감동받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시작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구간송미술관 상설전시실(좌), 간송미술관 전시실(우)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의 설계자
전 관장은 문화유산의 수호자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문화 설계자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대구·경북 지역의 지류 유물 보존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안동·상주 등 유림 전통이 깊은 지역에는 수많은 고문서, 서책, 고서들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기후 위기로 인해 보존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예전엔 선조들이 만든 서고 시스템만으로도 유물이 버텼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여름 습도, 미세먼지, 곰팡이, 모두 유물에는 재앙이죠."
이에 간송미술관은 대구관 내에 지류 보존 전문 수장고를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보존 과학 허브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 "단순히 보관하는 게 아니라, 활용과 연구, 교육까지 연결되는 통합적 모델을 만들고 싶어요."
전통을 지키는 일이 단지 박제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교육, 지역과 기술 속에서 유기적으로 숨 쉬게 하려는 그의 철학은 날이 갈수록 더 진화하고 있다. 문화보국은 지금,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한 번 감동한 사람은, 다음엔 스스로 문을 열고 찾아오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