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실장 나채선(환경생태공학 02), 전 세계 단 두 곳뿐, 시드볼트에서 지구의 미래를 대비하다
  • 작성일 2025.04.09
  • 작성자 고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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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야생식물 종자실

실장 나채선(환경생태공학 02)

전 세계 단 두 곳뿐, 시드볼트에서 지구의 미래를 대비하다

나채선 실장

야생식물은 생태계의 근간이 되는 만큼 그 보전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동안 무관심했던 야생식물 종자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도 뛰어난 연구진과 시설을 갖춘 기관들이 속속 출범하면서 최근 몇 년 새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그 변화를 이끈 연구자 중 하나가 나채선 교우다. 그에게 종자를 연구하고 보전하는 일은 미래 지구를 위한 일종의 사명이다.


씨앗 샘플

씨앗이 휴면 상태에서 깨어나 싹을 틔우는 과정 연구 중

보관된 야생식물 종자

시드뱅크에 라벨링해 보관된 야생식물 종자

그의 일터인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경북 봉화에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일컫는 말로, 백두대간수목원은 이 지역의 고산식물 보전을 목적으로 2017년 설립됐다. 특히 이곳에는 식물 종자를 장기 저장하는 '시드뱅크(seed bank)'와 함께, 전 세계에 단 두 곳뿐인 '시드볼트(seed vault)'가 나란히 운영되고 있다. 그는 시드뱅크와 시드볼트의 차이를 차분한 어조로 풀어 설명해줬다. "종자은행으로 불리는 시드뱅크는 우리나라에도 이미 여러 곳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1,700여 개가 있어요. 반면 시드볼트는 노르웨이와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시드뱅크는 쉽게 말해, 종자를 보전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연구하거나 재배에 활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저장소'다. 종자의 입출고가 자유롭고, 내부에서 다양한 실험과 응용이 이뤄진다. 그에 비해 시드볼트는 인류를 위한 '최후의 금고'라 할 수 있다. "지구에 대재앙이 닥쳐 종자가 멸종됐을 때를 대비해 만든 특수 시설이에요. 노르웨이에서는 주로 재배작물의 종자를, 우리나라에서는 야생식물 종자를 보관하고 있죠. 시드볼트에 들어간 종자는 사실상 다시 꺼내 쓰지 않는다는 전제를 갖고 있어요. 지구가 야생식물이 더 이상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이 되지 않는 이상, 꺼내지 않도록 설계된 곳이에요."

두 시설 모두 종자를 안정적으로 보전할 수 있도록 내부 환경을 정밀하게 조절한다.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외부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공간에서 종자들이 잠자고 있다. 그는 "시드뱅크와 시드볼트 모두 동일한 환경으로 설정돼 있고, 중요한 종자들은 두 곳에 중복 보관한다"고 설명했다. 만에 하나의 상황까지 대비하는 구조다.

특히 세계적으로 야생식물의 시드뱅크와 시드볼트를 모두 갖춘 곳은 이곳 백두대간수목원이 유일하다. 단순히 규모 있는 시설을 갖춘 것만이 아니라, 연구·보전·활용의 세 기능이 한 자리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종자 보전 허브'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그는 "야생식물 종자 연구로는 정말 최적의 환경"이라며, 생태계의 미래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심스럽게 되짚었다.


시드뱅크에서 종자를 살피는 나채선 실장

재배식물의 기원이 된 야생종 연구에도 주력

그가 이끄는 야생식물 종자연구실에서는 시드볼트를 중심으로 한 종자 복원은 물론, 종자의 활용, 주권 확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그중에서도 각각의 씨앗을 어떤 조건에서, 얼마나 오래 보관할 수 있는지, 어떤 조건일 때 휴면 상태에서 깨어나 어떻게 싹을 틔우는지 등을 살펴보는 연구는 미래 종자 복원을 위한 핵심 데이터다.

"2009년에 경남 함안의 유적지 발굴 현장에서 고려 시대 연꽃 씨앗이 발견된 적이 있어요. 전문가들이 발아를 위해 노력한 결과 꽃을 피웠어요. 무려 700년 만에 깨어난 거예요. 연꽃 씨앗이 워낙 단단한 데다, 진흙 속에 묻혀 있어서 잘 보존됐던 것 같아요. 여기 저장된 씨앗들이 훗날 이렇게 잘 활용되도록 연구하고 보존하는 게 저희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예요. 야생식물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아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아요. 그만큼 계속 새로운 게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게 이 연구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시드볼트백야생식물 종자실의 종자와 식물 표본 수집 활동

백두대간수목원에 위치한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좌), 백야생식물 종자실의 종자&식물 표본 수집 활동(우)

그가 요즘 주력하는 것은 재배식물의 원류가 된 야생종 연구다. 우리가 먹는 재배식물은 모두 야생종에서 파생됐다. 재배가 쉽고 수확량이 많게 개량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어 신종 전염병에 취약하다는 것. 해당 재배식물의 기원이 되는 야생종을 연구하면 병에 저항할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야생종은 자연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유전자풀(gene pool)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럽을 중심으로 2010년부터 재배작물의 친척 격인 '야생근연종(Crop Wild Relatives, CWR)'을 발굴하고 보전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 그의 주도로 처음 연구를 시작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올 연말에는 유럽연합이 주관하는 CWR 관련 대규모 글로벌 프로젝트에 우리나라를 대표해 지원할 계획이다. 그는 "지원 자격을 얻는 게 무척 까다로워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며, "그 연구과제에 선정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큰 목표"라고 말했다.


표본 수집 활동

표본 수집 활동

고려대는 야생식물 연구에 최적화된 환경

그가 처음 씨앗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야생식물 연구 권위자인 강병화 교수(현 명예교수)의 연구실에서 학부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야생식물 연구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강 교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호기심이 생겼고, 스승을 따라 연구자의 길에 들어섰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저명한 종자 연구팀에서 일했다.

야생식물 연구에서 앞서 있는 유럽에서 4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그는 자신의 경험을 한국에서 활용하게 되기를 바랐다. 마침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뱅크가 문을 열면서 기회를 얻었다. 개원 준비 단계부터 참여한 그는 연구실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도입하고, 연구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백지 상태'이던 시드뱅크를 하나씩 채워 나갔다. 또한 실력 있는 연구원들을 합류시키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종자 연구에 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국내에 마땅한 연구기관이 없어 오스트리아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인프라는 많이 달라졌다며, 그는 고려대에서 미래의 종자 연구자들이 양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고려대학교는 야생식물 종자 연구에 특화된 연구 환경을 갖추고 있어요. 강병화 교수님이 평생에 걸쳐 모은 종자를 기증하며 만들어진 '야생식물종자은행'이 있고, 무엇보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분야를 일찌감치 개척해 주신 교수님들이 가장 큰 경쟁력이죠. 주변에서 '종자 연구는 고려대가 다 하는 것 같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곳곳에서 활동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있어요(웃음)."

"이 일이 당장 성과가 나는 일은 아니지만 기후변화 시대에 꼭 필요한 연구주제이기도 하고, 국제적인 협업 기회도 많아요. 더 많은 후배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어, 모교의 탄탄한 연구 인프라를 발판 삼아 연구의 지평을 넓혀주기를 바랍니다."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나채선 실장

"야생종자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깨어나지 않아요. 반대로 조건이 맞으면 몇백 년이 지나도 싹을 틔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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