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 박사(일어일문학 94), 안암동을 드나들면서 익힌 도시답사의 눈
  • 작성일 2025.05.02
  • 작성자 고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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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도시문헌학자 ·
일어일문학 94)
안암동을 드나들면서 익힌 도시답사의 눈

강연하는 김시덕 박사의 모습

1994년 입학 이후 30년 가까이 안암동을 드나들며 눈에 익힌 풍경과 변화들— 도시문헌학자 김시덕 박사는 그 시간을 통해 도시를 보는 자신만의 눈을 길러왔다. 철도 개통이 바꿔놓은 상권, 무심히 지나쳤던 지하보도의 기억, 그리고 사라진 기와집들까지. 오랜 시간 축적된 그의 관찰을 따라, 우리가 늘 지나치는 안암동의 거리를 들여다본다.김시덕 박사 도시문헌학자.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와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에서 수학했으며,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HK교수를 지냈다. 『일본의 대외 전쟁』(2016,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전쟁의 문헌학』(2017, 세종도서 선정), 『서울 선언』 등에서 도시의 자취를 따라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와 삶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탐구해왔다.


1994년부터 2005년까지 고려대학교가 자리한 안암동과 그 주변 지역을 자주 드나들었다. 유학 기간을 제외하고 2010년부터 다시 이런 저런 일로 안암동 일대를 방문하고 있다. 한 지역을 30년간 정점관찰 하다 보면 배우는 것이 많다. 안암동을 자주 드나들던 시기에는 지금처럼 도시를 관찰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관찰하고 생각한 것이 적지 않았다. 이번에 원고를 의뢰받고 돌이켜보면서, 안암동에서 도시답사의 방법론을 여럿 몸에 익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요청받은 글은 안암동에 대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안암동을 중심으로 하되, 그 주변 지역도 아울러 말씀드린다.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 공간의 특성,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안암동 그리고 변화의 시작

1994년에 입학하고 나서 한동안 나의 통학 루트는 전철 1호선 제기동역에서 내려 선농단을 지나 안암오거리를 통해 문과대학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안암동 캠퍼스와 제기동역이 속한 행정구역이 성북구와 동대문구로 나뉘어 있다 보니 마을버스 운영이 쉽지 않다고 했다. 제기동역에 내리면 부촌(富村) 성북동을 떠올리게 하는 저택들이 블럭을 이루고 있었다. 이 블럭을 통과해서 선농단과 종암초등학교에 다다르면, 여기부터 안암오거리까지 포장마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고려대와 제기동역을 연결하는 길목이다 보니 상권이 형성된 것이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이 통학 루트를 이용할 날이 길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전철 6호선 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하철 공사 구간이 잇따라 홍수에 침수되면서 공사 기간은 계속 늘어났고, 결국은 대학원에 입학한 뒤에야 6호선을 이용할 수 있었다. 철도 공사는 사전 발표된 완공 시기가 무의미하며, 완공에 이르기까지 숱한 변수가 발생한다는 것을 이때 배웠다.

우여곡절 끝에 6호선이 운행을 시작하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기동역에서 안암동 캠퍼스에 이르는 도중에 있던 상권이 소멸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대학 주변의 상권이 침체에 빠진 것이다. 애초에는 6호선이 운행을 개시하면 주변에서 안암동으로 소비자들이 모여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고려대 구성원들이 지하철을 타고 외부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확인되었다.

고려시장 상가쪽문 밖 개량기와집 골목현재 참살이길의 모습

(시계방향으로) 고려시장 상가, 쪽문 밖 개량기와집 골목, 현재 참살이길의 모습

교통망과 제도가 바꾸는 상권

그때나 지금이나, 지자체장이나 정치인들은 경쟁적으로 자기 지역에 철도를 도입하려 한다. 하지만 철도가 들어서고 나면 지역민들이 서울로 이동하기 편해지는 바람에, 병원을 비롯한 그 지역의 상권이 붕괴되는 현상이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런 현상을 21세기 초의 안암동에서 확인했다.

6호선의 개통은 상권뿐 아니라 안암동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고려대가 자리한 성북구는 지형적으로 산과 계곡이 이어지는 곳이다 보니,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폐쇄적이 되기 쉬운 특성이 있다. 6호선이 성북구의 지형적인 폐쇄성을 해소할 가능성을, 6호선 개통 전후로 상권이 변화하는 양상으로부터 확인하고 있다.

안암동 지역의 상권과 폐쇄성이라고 하면, 1990년대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19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하는데, 후문을 나와 안암오거리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리트에 새로 들어선 카페에 당구대가 설치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이 카페가 상업주의를 부추긴다며, 교내의 어떤 단체가 카페 앞에서 시위를 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국제관에 외국계 패스트푸트 체인점이 들어선 것을 보면서, 이 폐쇄적인 계곡 동네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구나 하는 감회를 가졌다.

안암동 캠퍼스의 상권은 대학 출입구에 따라 형성되어 있다. 정문, 후문, 쪽문, 법대 및 사범대 입구, 공학관 입구 등, 출입구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늘 이상했던 것은 고려대 인문계 캠퍼스의 상권이 정문보다 후문 쪽에 더 크게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정문 쪽 상권이 후문보다 커지지 못했던 이유의 하나로, 그 당시 정문에서 길을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가 없어서 지하보도를 통과해야 했던 것을 든다. 이 지하보도에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이는 어떤 사람이 늘 서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힘이 약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그래서 특히 여성들은 이 지하보도를 통과하는 것을 꺼렸다. 고려대사거리와 지금의 고려대역에 각각 횡단보도가 있다 보니, 정문 바로 앞에 횡단보도를 설치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마음 편히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 대신 불편한 지하보도가 있었다는 사소한 사실이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한편, 쪽문 쪽 상권은 제도적인 이유에서 한때 번성했다.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0년에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어 자정 이후의 심야 영업이 제한되었는데, 이때 전통시장은 단속에서 제외되었다. 그에 더해 쪽문 쪽에는 횡단보도가 있었기 때문에, 원래라면 정문 앞으로 갔어야 하는 소비가 쪽문 쪽으로 몰렸다.

쪽문 건너편에 자리한 파전집을 종종 갔었는데, 얼마 전 그곳을 찾아가니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업체로 바뀌어 있었다. 한국의 대학들에서 외국인 유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커졌다는 뉴스를 요즘 자주 접하는데 이른바 인서울 대학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가게의 변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도시 화석의 흔적들: 개량기와집과 석조 건물

고려대 주변에서는 20세기 전기에 많이 만들어진 개량 기와집, 즉 도시형 한옥이 남아 있는 블럭을 종종 접하게 된다. 성북구는 1930년대 말에 도시계획이 실시된 지역으로, 조선인들의 주거 지역이 다수 배치되었다. 그래서 한때 서울 안의 한옥 단지라고 하면 안암동이나 보문동이 거론되었다. 입학하고 나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학교 주변의 기와집들이었다. 그 기와집들이, 한때 안암동 전체를 검게 뒤덮었던 기와집의 바다가 사라지고 드문드문 남은 도시화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고려대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도시화석은 그 개량 기와집들만이 아니다. 고려대 문과대학 앞에는 1950년대 석조 강당 건물이 있다. 광복과 전쟁 이후인 1950-60년대에 지어진 석조 건물들은 전국적으로 점점 귀중한 존재로서 주목받고 있다.

안암동에 드나들던 시절에는 무심코 지나쳤다가, 뒤늦게 그 중요성을 깨닫고 일부러 찾아가 기록했던 답사 포인트들이 있다. 청량리역 가는 길의 1920년대 블럭들, 경동시장, 청량리역 남쪽의 청과시장과 배후 주거지역 등. 또, 안암동에 드나들던 시절에는 몰랐다가 그 뒤에 새로이 발견한 포인트도 있다. 고려대역 북쪽의 고려시장 상가, 1950년대에 조성된 홍릉 부흥주택과 정릉 부흥주택 등.

안암동에 드나들던 시기에 이 도시화석들의 존재와 의의를 깨달았더라면 좀 더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늘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평소 지나는 길과 블럭의 모습을 무심히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두시기 바란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의 로드뷰 서비스는, 재건축 재개발이 되고 나면 중단된다. 고려대 본관 건물은 누구나 사진으로 찍어 두지만, 여러분에게 소중한 도시 경관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는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도시의 풍경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소중한 기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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