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다
‘닫힌 문’은 ‘고인 물’만큼 위험하다.
그 안에서 아무리 훌륭한 성과가
도출되더라도, 세상을 향해 문을 열지 않으면
저 홀로 빛이 바래거나 저절로 힘을 잃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국립암센터 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바로 그 ‘문 열기’다. 국립암센터의
연구자원을 모든 연구자들에게 개방하고,
암 빅데이터 공유를 위한 오픈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맡은 첫 번째
숙제다. 활짝 열어둔 문으로 아주 신선한
바람이 드나들 거라 그는 믿는다. 바람의
결이 바뀌면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는 법.
국립암센터의 ‘새봄’은 이제부터다.
“국립암센터의 주요기능은 공공의료에
있어요. 종양은행, 실험동물실, 코어랩,
GMP시설 등 우리가 가진 연구자원을
모든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할
생각이에요. 암센터가 보유한 암 빅데이터를
공유하고 중개하기 위해, 현재 오픈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에 힘쓰고 있어요. 빅데이터
활용은 환자별 맞춤형 정밀의료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줄이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거예요. 빅데이터 공유를
통해 암 연구와 암 진료와 암 정책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갈 겁니다. 국립암센터를
새로운 치료기술의 ‘테스트베드’이자, 연구와
진료와 정책을 연결하는 ‘터미널’이 되도록
할 거예요.”
국립암센터는 최근 암 빅데이터를
체계적으로 통합하고 관리하는
데이터웨어하우스와 임상연구검색포털을
구축했다. 아직은 암센터 내원 환자 49만
명의 데이터만 정리된 상태. 다른 기관의
데이터는 개인정보보호법 문제로 일단 보류
중이다. 하지만 공익의 목적으로 다른 기관의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암 관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 중에 있어, 설렘과
떨림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공공의료를 향한 ‘신임’ 원장의 포부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익성이나 위험도를
이유로 민간의료기관의 손이 닿지 않는
희귀난치암에 전문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것, 암 생존자 통합지지통합센터를 만들어
암 환자는 물론 환자 가족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것, 국가중앙호스피스센터의
역할을 통해 환자들의 ‘품위 있는 죽음’을
돕는 것…. 그가 그리는 암센터의 미래는
2020년 국립암센터 부속병원 완공과 함께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갈 것이다. 새순처럼
꿈이 돋아나고, 들풀처럼 소망이 번져간다.
길을 내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은 사실 ‘큰 뜻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우연히 또는 돌연히
그 길에 들어섰다가, 그 길을 ‘외길’로
삼게 되는 사람들. 그도 그 가운데 하나다.
마산여고 이과 수석이었던 그는(문과 수석은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었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음에도 ‘이과 수석에
걸맞게’ 의대엘 갔다. 고대 의대에서 또
수석 졸업을 했고, 고대 의대 여성졸업생 중
처음으로 외과의사가 됐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신체 일부보다는 신체 전반을
보살피는 전인적 의사가, 병을 ‘조절’하는
것보다는 병을 ‘낫게’ 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인턴 말기의 어느 점심시간, 그의
소망을 들은 선배가 말했다. 외과를 택하면
되겠다고.
“근데 막상 들어가니 너무 힘든 거예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외과
의국은 남성들의 세상이었거든요. 여성이
나 혼자니 모두들 나를 주시했어요.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죠. 화장실에서
몰래 울면서 1년을 버텼어요. 그랬더니
견딜 만해지더라고요. 하지만 몇 년 후에 또
벽에 부딪쳤어요. 난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원하는 직장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성적이
좋았음에도 기회가 없었던 걸 보면 내가
여성이라는 게 한몫했던 것 같아요. 고민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큰 애가 네 살,
작은 애가 6개월 때의 일이에요. 내 안의
갈등과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결국 유학을
선택했죠.”
귀국 후엔 고대 안산병원에서 유방암 수술
전문가로 활약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수술한 유방암 환자는 약 8,000여 명. 암
수술 후 유방을 예전 모양으로 만들어주는
유방 재건술 환자도 300여 명에 이른다.
유방암 환자들과의 동행은 그의 삶에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한 환자를 5~10년씩
만나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사를 자연스레
알게 됐다. 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겪는 고민과 고통에 마음을
내주는 일. 소녀시절 로맨티스트를 꿈꿨던
그가 ‘휴머니스트’로 살게 된 배경이다.
국립암센터와의 인연은 바로 그 ‘유방암
전문가’로서의 이력 때문이다. 국립암센터가
문을 열던 2000년, 초대 원장을 맡은 박재갑
박사가 유방암 쪽에 ‘젊고 실력 있는’ 의사를
데려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젊고
실력 있는 의사로 낙점된 그는 국립암센터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암센터의 발자취에 족적을 남겼다.
연구소장, 유방암센터장, 융합기술연구부장,
암예방검진센터장, 암의생명과학과 교수,
면역세포치료사업단장,…. 그를 ‘준비된
원장’이라 불러도 좋은 이유다.
흐르며, 함께하며
“2008년까지 암센터에 있다가, 고대
안암병원에서 다시 3년간 근무했어요.
그리고 다시 암센터로 돌아왔죠. 떠나있던
3년간 공공의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온 국민을 암으로부터 보호하고,
암 환자들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의 위대함에
대해서요. ‘들락날락’했던 경험이 외려 내겐
득이 됐어요. 새로 자리를 옮기면 제 아무리
경력자라도 ‘신참마인드’가 되잖아요.
누군가에게 텃세를 부릴 만한 시간이 내겐
없었어요.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에요.”
그는 우리사회의 ‘유리천장’을 깨고 최초의
타이틀들을 써내려간 개척자다. 그런 그가
고백한다.
전에는 남성들과 경쟁하느라 ‘여성들’의 삶과
성공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땅의
여성후배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자꾸 생각하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온힘을 다해 뛰어다녔던 자신의 뒤를, 후배
여성들이 어깨 펴고 당당히 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싶다.
“여성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당장은 어렵더라도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말자고, 그 뜻 안에서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노력해나가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그의 말은 ‘나처럼 해보라’는 주문이 아니다.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자, ‘곁에 있겠다’는
약속이다. 강물은 흐르며 함께하며 바다로
나아간다. 멈춘 적 없는 그의 강물 위에,
희망과 연대의 햇살이 반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