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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피란길을 수행한 마부의 공신교서, 일본서 발견돼
  • 글쓴이 : 커뮤니케이션팀
  • 조회 : 2011
  • 일 자 : 2018-03-14


선조의 피란길을 수행한 마부의 공신교서, 일본서 발견돼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교토대 도서관 조사 결과

 

 

 

호성공신교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는 2월 19일부터 24일까지 일본 경도대학 부속도서관 소장 한국고문헌 자료조사를 실시했다.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연구팀은 이번 조사를 통해 마부 오연(吳連)에게 내린 호성공신(扈聖功臣)교서 등 보물급 유물을 비롯하여 안평대군의 글씨로 주조한 금속활자인 경오자로 쓴 역대병요(歷代兵要), 세종의 일곱 번 째 아들 평원대군의 장서인이 찍힌 대학연의, 현재까지 발견된 만성보(萬姓譜) 중 가장 많은 성씨가 수록된 만성보 등 희귀본 귀중서를 대량 발견했다.

 


마부의 호성공신교서

 

 

호성공신은 선조가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하는 공을 세운 86명에게 1604년 내린 것이다. 공신교서는 국내에 9개가 남아 있는데, 그중 6개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기존 교서는 문신(8개)과 의관(1개)의 것뿐이어서 ‘이마(理馬, 사복시·司僕寺에서 궁중의 말을 관리하던 잡직)’가 받은 공신교서가 발견된 것은 ‘오연교서’가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교서는 “임금을 존경하고 윗사람을 친근히 대하는 마음은 귀천에 차이가 없으니 노고에 보답하고 공로에 답하는 은전에 어찌 경중을 구별하겠는가? 이에 법도에 따라 특별한 예우를 보이노라.....지난 날 동쪽 오랑캐가 흉포하게 나라를 유린하여 어가가 허둥지둥 서쪽으로 피신하였을 때에 크고 작은 고을이 모두 붕괴되니 조정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이 대부분 짐승이 달아나듯 새가 숨어버리듯 하였는데, 너는 하례(下隷·낮은 신분)로서 임금을 뒤로하지 않고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루었고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온 마음으로 마부의 역할을 다 하였으니”라며 오연이 낮은 신분임에도 충성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용사호종록(龍蛇扈從錄)’은 그가 “부여(扶餘)의 정병(正兵)으로서 어가를 따랐다”고 기록했다.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정병은 정규군으로, 오연은 양민 출신으로 군대에 갔다가 선조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시 선조의 공신 책봉은 형평성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비판을 받는다. 전투에서 목숨 바쳐 싸운 장수 등에게 내린 ‘선무(宣武)공신’이 18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주요 장수와 의병장이 제외된 탓이다. 반면 선조는 ‘호성공신’을 대규모로 책봉해 자신을 보좌한 이들은 마부까지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챙겼다. 그러나 당대 사신(史臣)이 호성공신을 “미천한 복례(僕隷·종)들이 20여 명이나 됐다”고 비판하며 이마를 비롯한 하층민의 책봉에 마뜩잖아 한 시각은 신분 차별적이라는 평가다. 국내에 있는 1604년 호성공신교서는 거의 보물이나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오연공신교서는  신지제(申之悌)가 작성하였다. 이때 오연은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져 낙안 오씨 석성군파의 시조가 됐다.

 

 

 

 

역대병요

 

 

안평대군의 서체로 주조한 경오자 ‘역대병요(歷代兵要)’



‘비운의 활자’ 경오자로 인쇄된 ‘역대병요’ 유일본도 확인됐다. 당대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의 서체를 자본(字本)으로 만든 경오자는 안평대군의 군호(君號)를 따서 ‘안평자(安平字)’ 등으로도 불린다.



경오자는 세종이 승하한 뒤 대군들이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경을 인출해 내었는데 불경 인출을 중단하라는 유신들의 반대 상소가 잇달아 올라오자 문종은 어쩔 수 없이 주자소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대군들은 경오자를 주조하여 정음청(正音廳)에서 불경을 인출해 냈다.



경오자는 당시 “책의 인쇄에 으뜸인 활자”로 평가되었다. 바탕 글자를 쓴 이의 서체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활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려대학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는 “그러나 경오자는 불과 6년(1450∼1456년)만 사용됐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안평대군이 썼다는 이유로 녹여버리고 새 활자를 만든 탓”이라고 했다. 경오자는 짧은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에 6종만 남아 있다.

 

 

 

역대병요

 

 

평원대군의 장서인이 찍힌 ‘대학연의(大學衍義)’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1427∼1445)의 장서인 ‘근행지당(謹行之堂)’이 찍힌 ‘대학연의(大學衍義)’도 포함됐다. 이 책은 19세의 나이로 요절한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이 직접 열람했던 󰡔대학연의󰡕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대학연의󰡕는 왕위에 오를 세자가 반드시 공부해야 할 제왕학의 교재였다. 세종 또한 󰡔대학연의󰡕를 애독했다. 평원대군은 시경(詩經), 예기(禮記) 등의 경전과 󰡔대학연의󰡕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평원대군은 자신이 직접 열람한 서적에 “근행지당(謹行之堂)”이라는 장서인을 찍었다. “근행지당(謹行之堂)”은 평원대군의 호인 근행당(謹行堂)에서 왔다.

 

 


 


이 장서인은 현재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이번에 조사한 ‘대학연의(大學衍義)’는 조선시대 만들어진 활자 중 가장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갑인자(甲寅字)로 인쇄된 책이다.

 

 

 

만성보


최다 인명이 기록된 19세기 중엽의 ‘만성보(萬姓譜)


최다 인명이 기록된 19세기 중엽의 ‘만성보(萬姓譜·온갖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 모은 책)’ 40책 역시 발견됐다. 조선 후기에 작성됐으며 딸과 사위까지 포함했다. 조사에 참여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은 기존 만성보보다 3, 4배 방대한 분량”이라며 “과거 합격 이력, 관직, 혼맥 등 조선 지배 세력의 인적 네트워크를 파악할 수 있는 최대 ‘인물 뱅크’다”라고 했다.



이번 조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자료센터 사업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연구책임자인 국어국문학과 정우봉 교수는 “한중연의 한국학자료센터 사업은 10년간 진행됐으나 연장안이 정부 예산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올해 6월을 마지막으로 해외 조사도 잠정 중단된다”며 “한국학 연구의 보고(寶庫)인 해외 자료 조사가 장기적 안목으로 지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구팀 사진

▲ 일본 경도대학 부속도서관 귀중서고에서 연구진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박영민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연구교수,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장, 정우봉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및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장, 아카자와 히사야 경도대학 부속도서관 정보서비스 과장

 

 

 

 

 

커뮤니케이션팀 서민경(smk920@korea.ac.kr)